사랑방에서 소근소근/비처럼 음악처럼
글이란?
알 수 없는 사용자
2006. 10. 4. 09:50
돌아가신 이오덕 선생님께서 글은 자신의 삶 속에서 써야 한다고 강조 하셨는데, 우연히 같은 내용을 아버지 라는 잡지에서 보게 되어 반성하는 의미에서 옮겨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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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시를 써라.
(섬진강 시인으로 알려진 김용택 시인을 취재/정리한 송현영님의 글임.)
천상 농부였던 아버지
아버지(김규팔 옹)는 평생 농부의 삶을 살다 가셨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부지런히 논이나 들에 나가 일하시던 땅 욕심이 아주 많은 전형적인 농부였다. 자식에 대한 걱정이나 근심도 논이나 볕에서 일하며 풀어버리시던 아버지는 언제나 자식들에게는 묵묵했다. 동생들 뒷바라지 하느라 서른 중반까지 노총각으로 지낸, 혼기를 놓친 큰아들이 걱정스러우셔도 한 번도 입 밖으로 드러낸 적이 없으셨다.
17세에 아버지에게 시집 온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 한 분만 보고 사셨다. 명랑하고 다정다감한 어머니는 아버지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아버지 한 분만 바라 보셨고 아버지에게는 늘 지극정성이셨다.
내가 나고 자란 진메 마을 은 동네사람 누구나 가족같이 지내던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작은 마을에서 동네 처녀와 로맨스를 만들었다. 어머님이 이 사실을 알고 많이 화를 내고 싸우셨던 것 같은데 내 기억엔 없다. 자식들에게 안 보이려고 들에 나가 같이 일하면서 싸우셨다고 한다. 나중에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아내가 어머님과 아버님 이야기를 나누다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이었지만 지금도 말이 없이 무뚝뚝했던 아버지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그 시대 아버지들이 모두 그랬고 아버지 역시 자식들에게 과묵했다. 다만 아버지는 늘 이른 아침에 논이나 들로 나가 열심히 일하시는 모습만 보여 주셨다.
초등학교 2학년인가 3학년 때였나 보다. 버스가 없던 시절이라 아버지와 난 20리 길을 걸어 강진에서 열리는 장에 갔다 오는 길이었다. 어느 마을을 지나가는 데 아버지가 큰 기와집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올려다보셨다. 번듯하게 올려진 검은 기와지붕과 추녀, 대문을 보시면서 “용태아 나도 저런 집에서 살고 싶다.” 아버지 얼굴에는 평소에 과묵한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던 부러움이, 부지런히 일만하는 아버지가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던 바람들이 드러나 있었다. ‘아버지에게도 부러움이 있구나!’ 그 모습이 무척 또렷했다.
훌 4남2녀의 맏이였던 나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을 도와서 들이나 밭에 나가 일을 했다. 어린 동생들의 뒤치다꺼리는 늘 맏이인 내 몫이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와 논에서 쟁기를 만지거나 볕에서 호미질을 하거나 했는데 아버지는 한 번도 잔소리 하신 적이 없었지만 호미나 낫을 어떻게 잡는지 자분자분 가르쳐 준 적도 없었다. 내가다 알아서 스스로 터득해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를 뽑는 임용고시에 합격해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당시 모자라는 교원을 충당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고교 졸업자도 응시할 수 있도록 했는데, 시험에 합격했다고 좋아했던 어머니의 얼굴이 생생하다. 아버지는 내색도 안 하시고 말씀은 안 하셨지만 무척 기뻐하셨다고 한다.
고달픈 농부의 삶을 물려받지 않아도 된다고 무척 좋아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생전에 한번도 내색하지 않으셨고, 이 이야기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어머니에게서 들었다.
가치있는 삶에 대한 깨달음
아버지는 평생 일만 하셨지만 참 행복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간이 안 좋으셔서 돌아가시기 몇 년은 병마에 시달리셨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병구완하는데 지극정성을 다하셨다. 진심으로 사랑한 지아비에 대한 섬김이었고, 한 인간이 한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예의를 다했다. 병에 좋다는 다슬기, 굴미나리, 간에 좋다는 약초들을 대며 돌아가실 때까지 최선을 다해 아버지를 보살폈던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한 남자를 그렇게 좋아한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참가치 있는 삶을 사신 것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어머니에게 남긴 말들이 있다. “임자 나 허고 사느라 애썼네 잉. 사는 것이 참 금방이네. 산다는 것이 바람같은 것이여.”
아버지의 이 세 마디 말 속에 많은 의미가 있었다. 늘 땅 욕심, 일 욕심이 많아 농사만 지었던 아버지의 삶이 아쉬웠지만, 그 중에서도 어머니에게 못다 해주었던 지아비의 정이 미안하고 감사했나 보다. 어머니께서 실수로 아버지가 아끼시던 나무 가지에 상처를 내면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역정을 내셨는데 당신이 모질게 대했다고 생각했나 보다. 못내 아쉽고 미안한 마음이 단 세마디 말속에 녹아 있었다.
두 분은 금슬이 참 좋았는데 어머니가 더 많이 아버지를 사랑하고 따랐던 것 같다. 지금에서야 왜 그렇게 아버지가 좋았냐고 물어보면 잘 모르겠다고 하신다. 이유를 모르고 좋아해야 평생 좋아할 수 있는데 이유를 알고 좋아하면 그 조건이 사라질 때 감정도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이유없이 사랑해야 평생을 간다는 게 어머니의 말씀이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만큼은 더할 나위 없는 남편이었다. 우리에겐 무뚝뚝해도 어머니에겐 살갑게 이야기도 하시고 우스갯소리도 잘하셔서 힘든 밭일을 하시면서도 늘 웃으며 일했다고 기억하시니 말이다. 난 아버지의 삶이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가까운 아내에게 인정받은 지아비였고, 아버지가 말없이 가르쳐 준 삶의 태도들,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땅에 성실하게 임했던 모습들이 자식인 나에게 그대로 체득되었기 때문이다.
가치 있는 삶을 산다는 건 출세하고 부를 누리고 삶이 풍요로워야 하는 것을 떠나 자신이 처해 있는 어떤 환경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자기의 것으로 끌어안고 보듬고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인생의 어려움들을 만났을 때 못난 사람은 비켜 가고 잘난 사람들은 내 것으로 만든다는 어른들의 이야기가 있다. 인생의 어려운 고비를 만났을 때, 무거운 짐을 나눠 가질 부부라는 친구가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아버지처럼 나는 그런 점에서 참 행복하다.
꽃보다 예쁜 아내
내 아내는 셋째 동생의 친구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문상을 왔었다. 아내는 처음 날 봤을 때부터 이유 없이 그냥 내가 좋았고 나에게 시집 오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한다니 처가에서는 열네 살이나 나이 많은 가난한 노총각에게 시집가겠다는 딸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내는 도망치다시피 나와서 나와 결혼했고 20여 년 동안 한결같이 내게 좋은 아내로 최선을 다해주었다. 어느 날 꽃구경을 가서 아내가 나를 보며 "여보 여보, 꽃이 예뻐? 내가 예뻐?"하고 물었다.
"아이고 이 꽃이 암만 예뻐도 당신만큼 예쁜 꽃은 못 봤네. 당연히 당신이 더 예쁘지"
우리 부부가 이렇게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다른 부부들은 무척 놀렸지만 난 진짜다.
아내가 제일 예쁘고 사랑스럽다. 그래서 세상이 예쁘고 세상사람들이 존경스럽다 사소한 것들을 사랑하고 나의 일상을 존중해야 시를 쓸 마음이 생긴다.
시와 삶은 분리될 수 없다. 삶의 실천이 시에 녹아 있어야 진짜라고 생각한다. 시는 삶을 정리하는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어쩌면 아내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시인은 시인이 아니다. 아내에게 믿음을 얻는 시인이 진짜시인이다. 작은 것이라도 소중한 일상의 세세함이 녹아든 삶은 중요하다. 난 아내와 함께 나누는 일상의 작은 것들을 사랑했다.
사랑하는 것들을 자꾸 이야기 하다보니 시가 되어 있었다. 내가 생각했을 때 나는 참 빛나는 삶을 살았다. 시를 통해 나름대로 이 세계를 이해했고 모름지기 살아가야 할 세상을 꿈꾸었기에,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기에 과분하다.
농사일을 하며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살았던 아버지나 시를 통해 작은 일상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수 있는 나는 복이 있는 사람이다. 누구보다 아들인 민세가 “아버지의 시를 통해 시골마을을 다시 보게 되었어요.”라고 말해주었을 땐 뭉클했다. 나를 보고 ‘귀여운 아버지’ 라고 불러주던 아들은 자기 소신대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난 내 아들이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힘이 들더라도 성실하고 치열하게 살기를 바란다. 자신이 원하는 공부를 위해 미국에 간 아들은 그런 점에서 나에게 신뢰감을 준다. 작은 것에 감동하고 감사하는 아내와 내가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 준 것이 아이들에게 건강한 가치관을 심어 준 것 같다. 무뚝뚝한 아버지가 어머니에게만은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람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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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시를 써라.
(섬진강 시인으로 알려진 김용택 시인을 취재/정리한 송현영님의 글임.)
천상 농부였던 아버지
아버지(김규팔 옹)는 평생 농부의 삶을 살다 가셨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부지런히 논이나 들에 나가 일하시던 땅 욕심이 아주 많은 전형적인 농부였다. 자식에 대한 걱정이나 근심도 논이나 볕에서 일하며 풀어버리시던 아버지는 언제나 자식들에게는 묵묵했다. 동생들 뒷바라지 하느라 서른 중반까지 노총각으로 지낸, 혼기를 놓친 큰아들이 걱정스러우셔도 한 번도 입 밖으로 드러낸 적이 없으셨다.
17세에 아버지에게 시집 온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 한 분만 보고 사셨다. 명랑하고 다정다감한 어머니는 아버지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아버지 한 분만 바라 보셨고 아버지에게는 늘 지극정성이셨다.
내가 나고 자란 진메 마을 은 동네사람 누구나 가족같이 지내던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작은 마을에서 동네 처녀와 로맨스를 만들었다. 어머님이 이 사실을 알고 많이 화를 내고 싸우셨던 것 같은데 내 기억엔 없다. 자식들에게 안 보이려고 들에 나가 같이 일하면서 싸우셨다고 한다. 나중에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아내가 어머님과 아버님 이야기를 나누다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이었지만 지금도 말이 없이 무뚝뚝했던 아버지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그 시대 아버지들이 모두 그랬고 아버지 역시 자식들에게 과묵했다. 다만 아버지는 늘 이른 아침에 논이나 들로 나가 열심히 일하시는 모습만 보여 주셨다.
초등학교 2학년인가 3학년 때였나 보다. 버스가 없던 시절이라 아버지와 난 20리 길을 걸어 강진에서 열리는 장에 갔다 오는 길이었다. 어느 마을을 지나가는 데 아버지가 큰 기와집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올려다보셨다. 번듯하게 올려진 검은 기와지붕과 추녀, 대문을 보시면서 “용태아 나도 저런 집에서 살고 싶다.” 아버지 얼굴에는 평소에 과묵한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던 부러움이, 부지런히 일만하는 아버지가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던 바람들이 드러나 있었다. ‘아버지에게도 부러움이 있구나!’ 그 모습이 무척 또렷했다.
훌 4남2녀의 맏이였던 나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을 도와서 들이나 밭에 나가 일을 했다. 어린 동생들의 뒤치다꺼리는 늘 맏이인 내 몫이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와 논에서 쟁기를 만지거나 볕에서 호미질을 하거나 했는데 아버지는 한 번도 잔소리 하신 적이 없었지만 호미나 낫을 어떻게 잡는지 자분자분 가르쳐 준 적도 없었다. 내가다 알아서 스스로 터득해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를 뽑는 임용고시에 합격해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당시 모자라는 교원을 충당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고교 졸업자도 응시할 수 있도록 했는데, 시험에 합격했다고 좋아했던 어머니의 얼굴이 생생하다. 아버지는 내색도 안 하시고 말씀은 안 하셨지만 무척 기뻐하셨다고 한다.
고달픈 농부의 삶을 물려받지 않아도 된다고 무척 좋아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생전에 한번도 내색하지 않으셨고, 이 이야기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어머니에게서 들었다.
가치있는 삶에 대한 깨달음
아버지는 평생 일만 하셨지만 참 행복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간이 안 좋으셔서 돌아가시기 몇 년은 병마에 시달리셨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병구완하는데 지극정성을 다하셨다. 진심으로 사랑한 지아비에 대한 섬김이었고, 한 인간이 한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예의를 다했다. 병에 좋다는 다슬기, 굴미나리, 간에 좋다는 약초들을 대며 돌아가실 때까지 최선을 다해 아버지를 보살폈던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한 남자를 그렇게 좋아한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참가치 있는 삶을 사신 것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어머니에게 남긴 말들이 있다. “임자 나 허고 사느라 애썼네 잉. 사는 것이 참 금방이네. 산다는 것이 바람같은 것이여.”
아버지의 이 세 마디 말 속에 많은 의미가 있었다. 늘 땅 욕심, 일 욕심이 많아 농사만 지었던 아버지의 삶이 아쉬웠지만, 그 중에서도 어머니에게 못다 해주었던 지아비의 정이 미안하고 감사했나 보다. 어머니께서 실수로 아버지가 아끼시던 나무 가지에 상처를 내면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역정을 내셨는데 당신이 모질게 대했다고 생각했나 보다. 못내 아쉽고 미안한 마음이 단 세마디 말속에 녹아 있었다.
두 분은 금슬이 참 좋았는데 어머니가 더 많이 아버지를 사랑하고 따랐던 것 같다. 지금에서야 왜 그렇게 아버지가 좋았냐고 물어보면 잘 모르겠다고 하신다. 이유를 모르고 좋아해야 평생 좋아할 수 있는데 이유를 알고 좋아하면 그 조건이 사라질 때 감정도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이유없이 사랑해야 평생을 간다는 게 어머니의 말씀이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만큼은 더할 나위 없는 남편이었다. 우리에겐 무뚝뚝해도 어머니에겐 살갑게 이야기도 하시고 우스갯소리도 잘하셔서 힘든 밭일을 하시면서도 늘 웃으며 일했다고 기억하시니 말이다. 난 아버지의 삶이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가까운 아내에게 인정받은 지아비였고, 아버지가 말없이 가르쳐 준 삶의 태도들,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땅에 성실하게 임했던 모습들이 자식인 나에게 그대로 체득되었기 때문이다.
가치 있는 삶을 산다는 건 출세하고 부를 누리고 삶이 풍요로워야 하는 것을 떠나 자신이 처해 있는 어떤 환경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자기의 것으로 끌어안고 보듬고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인생의 어려움들을 만났을 때 못난 사람은 비켜 가고 잘난 사람들은 내 것으로 만든다는 어른들의 이야기가 있다. 인생의 어려운 고비를 만났을 때, 무거운 짐을 나눠 가질 부부라는 친구가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아버지처럼 나는 그런 점에서 참 행복하다.
꽃보다 예쁜 아내
내 아내는 셋째 동생의 친구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문상을 왔었다. 아내는 처음 날 봤을 때부터 이유 없이 그냥 내가 좋았고 나에게 시집 오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한다니 처가에서는 열네 살이나 나이 많은 가난한 노총각에게 시집가겠다는 딸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내는 도망치다시피 나와서 나와 결혼했고 20여 년 동안 한결같이 내게 좋은 아내로 최선을 다해주었다. 어느 날 꽃구경을 가서 아내가 나를 보며 "여보 여보, 꽃이 예뻐? 내가 예뻐?"하고 물었다.
"아이고 이 꽃이 암만 예뻐도 당신만큼 예쁜 꽃은 못 봤네. 당연히 당신이 더 예쁘지"
우리 부부가 이렇게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다른 부부들은 무척 놀렸지만 난 진짜다.
아내가 제일 예쁘고 사랑스럽다. 그래서 세상이 예쁘고 세상사람들이 존경스럽다 사소한 것들을 사랑하고 나의 일상을 존중해야 시를 쓸 마음이 생긴다.
시와 삶은 분리될 수 없다. 삶의 실천이 시에 녹아 있어야 진짜라고 생각한다. 시는 삶을 정리하는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어쩌면 아내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시인은 시인이 아니다. 아내에게 믿음을 얻는 시인이 진짜시인이다. 작은 것이라도 소중한 일상의 세세함이 녹아든 삶은 중요하다. 난 아내와 함께 나누는 일상의 작은 것들을 사랑했다.
사랑하는 것들을 자꾸 이야기 하다보니 시가 되어 있었다. 내가 생각했을 때 나는 참 빛나는 삶을 살았다. 시를 통해 나름대로 이 세계를 이해했고 모름지기 살아가야 할 세상을 꿈꾸었기에,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기에 과분하다.
농사일을 하며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살았던 아버지나 시를 통해 작은 일상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수 있는 나는 복이 있는 사람이다. 누구보다 아들인 민세가 “아버지의 시를 통해 시골마을을 다시 보게 되었어요.”라고 말해주었을 땐 뭉클했다. 나를 보고 ‘귀여운 아버지’ 라고 불러주던 아들은 자기 소신대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난 내 아들이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힘이 들더라도 성실하고 치열하게 살기를 바란다. 자신이 원하는 공부를 위해 미국에 간 아들은 그런 점에서 나에게 신뢰감을 준다. 작은 것에 감동하고 감사하는 아내와 내가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 준 것이 아이들에게 건강한 가치관을 심어 준 것 같다. 무뚝뚝한 아버지가 어머니에게만은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람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