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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떠난 왕자 <앙뜨완 드 생텍쥐페리> 이윤기 님

알 수 없는 사용자 2005. 8. 19. 16:55
1920년, 스트라스부르 제2전투기 연대 활주로. 교관이 갓 뽑혀 들어온 조종사 후보생들을 모아놓고 낡은 연습기의 계기반을 가리키며 명칭과 기능을 일일이 설명한다. 그리고는 후보생들을 이끌고 강의실로 들어간다. 후보생 하나가 강의실로 몰려 들어가는 후보생 대열에서 가만히 이탈하여 연습기를 맴돈다. 그는 강의실 쪽을 힐끔거리고 있다가 가만히 조종석으로 숨어 들어 조종간을 잡는다. 연습기는 활주로를 미끄러지다 둥실 하늘로 떠오른다. 강의실에서 교관들과 후보생들이 우르르 몰려 나와 연습기를 올려다본다. 교관들은 욕지거리를 퍼붓고 후보생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휘파람을 불어댄다.
그는 연습기를 이륙 시키고 싶었을 뿐, 착륙 시키는 법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한동안 하늘을 날던 그는, 연습기를 반쯤 부숴 먹은 다음에야 활주로에다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연착과는 거리가 먼 무모한 동체 착륙이다. 헌병 손에 영창으로 끌려가는 그의 등을 바라보면서 교관 중 하나가 중얼거린다.
“천상하늘에서 죽을 녀석이야”
앞뒤 돌아보지 않고 연습기를 하늘로 몰고 올라간 후보생이 바로 생텍쥐페리다. 그가 조종사 면허증을 딴 것은 그로부터 2년 뒤, 영창살이를 끝내고 카사블랑카 파견 부대에 근무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아름답게 슬픈 이야기 『어린 왕자』는, 불시착과 추락사고로 점철되는 항공기 조종사의 척박한 삶에서 피어난 한 송이 꽃이다.
『어린 왕자』는 그의 이름을 별의 높이까지 드높인, ‘한 어른의 어린시절’에 바친 이야기다.
1900년은 니체의 한살이가 닫힌 해, 생텍스(생텍쥐페리의 애칭)의 한살이가 열린 해다. 니체를 존경하는 내성적인 청년 생텍스가 1919년 해군사관학교를 지망한 것은 삶터로서 영원으로 열린 공간을 선택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바다는 끝이 없는 곳, 영원으로 열려 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그는 해군사관학교 입학에 실패한다. 불어 시험 문제,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의 인상에 대해서 쓰라’가 실패의 원인이 된다.
불어 시험 교관이 답안지에서 발견한 것은 생텍스가 쓴 단 하나의 문장.
“나는 전쟁 터에 나가 본 일이 없으므로 병사의 인상에 대해 아는 척하고 싶지도 않을 뿐더러 쓰고 싶지도 않습니다.”

생텍스는 인생살이에서 의미가 없는 것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기로 하고, 해군사관학교는 의미가 없는 것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기로 한 이 청년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한다. 청년은 해군사관학교의 배 대신에 교회에 심취한다. 배를 타면, 바다가 마련해 놓은 무한공간에 취하는 이 청년에게 성당은 또 하나의 거대한 돌배(石船)와 같은 존재다. 그는, 적당한 적요(寂寥)가 깃들이면 돌배는 바다보다 더 넓은 공간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그에게 비행기는 또 하나의 배, 하늘을 날아다니는 배다. 그가 전투기 연대에 들어간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는 항공기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했던 것일까?

자연주의자인 미국의 시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생텍스를 견주어 보는 일은 무의미하지 않다. 이 둘은, 시대는 다르지만, 끊임없이 인간을 관찰하면서 44년이라는 짧은 세월을 이 땅에서 살다 떠난 사람들이다. 하지만 전자와 후자는 인간을 관찰하는 지점에서 극단을 이룬다. 전자는 무위 자연의 ‘무위’ 라는 자리에 앉은 채, 자연을 무찌르는 인간을 관찰하고, 후자는 기계 문명의 총화라고 해도 좋을 항공기 조종사로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지성인으로서, 생존의 본질을 상실해 가는 인간을 관찰한다. 전자는 인간이 문명을 떠나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후자는 인간이 문명 속에서 어떤 인간 관계를 유지하면서 존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관찰한다. 전자에게 자연은 ‘오래 된 문제로부터 인간을 행복하게 해준 자리’ 지만 후자에게 항공기 조종석은, ‘오래 된 문제로부터 인간을 행복하게 해준 자리가 아니라, 오래 된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관찰하게 한 자리’ 다. 생텍스의 관찰 기록이 소설 『야간 비행』,『인간의 대지』, 『성채』 같은 명편들이다.
작가 자신이 삽화까지 곁들인, 어른을 위한 동화 『어린 왕자』의 기둥 줄거리는 매우 간요(簡要)하다. 사막에 불시착한 한 항공기 조종사가 이상한 별에서 온 이상한 왕자를 만났다 떠나 보내기까지를 기록한 이야기다. 그러나 메시지가 지니는 해석의 여지는 그지없이 풍부하다. 두 시간이면 독파할 수 있는 『어린 왕자』가, 독자에게 별 하나 껴안는 듯한, 벅차면서도 낯선 감동을 주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어린 왕자』는, 작가 자신이 여섯 살 때 그렸다는 그림 얘기로 시작된다.
작가는 어린 시절, 맹수를 삼킨다는 보아 구렁이 이야기를 읽는다. 너무 큰 맹수를 삼킨 나머지 움직일 수 없어서 반 년 동안이나 잠을 자면서 삼킨 것을 소화한다는 무서운 구렁이 이야기다. 어린 생텍스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 구렁이를 상상하고는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 어른들에게 보여 주면서 무섭지 않느냐고 묻는다. 속이 안 보이는 보아 구렁이 그림이다. 어른들은 모자를 왜 무서워해야 하느냐고 되묻는다. 어린 생텍스는 보아 구렁이의 뱃속에 들어 있는 코끼리를 그려 보여 준다. 말하자면 속이 보이는 보아 구렁이 그림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제서야 어른들은 그게 모자 그림이 아니라 코끼리를 삼킨 보아 구렁이라는 것을 납득한다. 어린 생텍스는, 어른들은 설명해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납득하지 못하는 이상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어른들은 생텍스에게, 속이 안 보이는 보아 구렁이 그림 따위는 집어치우고 지리나 역사, 문법과 산수 같은 것에 관심을 가져 보라고 충고한다. 생텍스는 그 충고에 따라 겨우 여섯 살때 화가 노릇을 포기한다.
그러나 그는 어른이 된 다음에도, 코끼리를 삼킨, 그러나 속이 보이지 않는 보아 구렁이 그림을 가지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묻는다. 이거, 뭘 그런 것 같아요? 사람들의 대답은 한결같다.
모자를 그린 것 같군요.
그가 사막에서 만난 이상한 왕자는 다르다. 생텍스가, 속이 안 보이는 보아 구렁이 그림을 보여 주면서 무엇을 그린 것 같으냐고 묻자 왕자는 반문한다.
“아니, 코끼리를 삼킨 보아 구렁이 아니에요?”
생텍스의 견해에 따르면 어린 아이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데 어른들 문화에 적응하는 몸 만들기 과정에서 이 앎을 상실함으로써 실낙원에 합류한다. 복락원(復樂園)에 대한 시도가 담긴 생텍스의 『어린 왕자』는, 아이의 마음자리로 돌아가지 않으면 천국에 이를 수 없다는 성경 구절을 상기시킨다.

1926년 항공사에 입사한 이래 생텍스는 18년 동안 항공기 조종사와 작가라는 이중적인 삶을 살게 된다. 그는 ‘갑자기 방향을 바꾸는 변덕스러운 바람’ 과 ‘시점에 따라 달라 보이는 믿을 수 없는 별들’ 과 ‘온 존재를 삼키는 듯한 하늘의 어둠’에 뛰어들고, 이러한 행동을 통해 이 ‘믿을 수 없는 것들’로부터 아름다움의 총화를 읽어 내고 그것을 쓴다. 그는, 소총 3백 자루를 가진 사막의 도적들로부터 토끼처럼 집중 사격을 받은 적도 있고, 사이공에서 파리로 귀환하는 길에 사하라사막에 불시착, 식수 한 방울 없이 닷새 동안이나 사막을 헤매다 베두인 낙타몰이 덕분에 기적적으로 생환한 적도 있다. 『어린 왕자』의 배경이 되고 있는 듯한 이 사막의 불시착 상황은 그의 소설 『인간의 대지』에 손에 잡힐 듯이 묘사되어 있다.

1943년, 지구상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시인(詩人) 『어린 왕자』를 창조한 생텍스는 다음 해인 1944년 7월 31일, 이 지구상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조종사로 출격한다. 6시간분의 연료를 넣고 떠난 그의 실종 사실이 확인된 것은 출격한 지 여덟 시간이 지난 14시 30분.
그로부터 5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실종을 둘러싼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고 있다. 천상 하늘에서 죽을 녀석이야---- 교관의 예언은 이로써 이루어진다. 그의 글 한 줄이 가슴을 친다.

죽음을 보상으로 여기라. 포구에 묶여 있는 배를 난바다로 풀어주는 것, 그것이 죽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