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에서 소근소근/비처럼 음악처럼
앎이란?
알 수 없는 사용자
2006. 11. 16. 18:12
아무것도 아무것도 <후꾸오까 마사노부지음/최성현•조현숙 옮김., 정신세계사 발행> 에서 옮긴 글이다. 모르는 것이 약인가 아닌가, 지혜란 무엇인가, 인간이 알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주는 글이다. 인터넷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관념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길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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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은 무용하다.
노인은 인간의 앎을 부정한다. 지혜 또한 미워하고, 아는 것의 무용함을 부르짖는다.
“사람은 춥고 더움을 알고 나서 그것 때문에 괴로워한다. 맛을 알고 나면 맛없음을 한탄하게 되고, 부귀를 알고는 그것 때문에 괴로워한다. 또 미추를 알고는 아름다움이나 추함으로 괴로워한다. 아는 것은 근심의 시작이라는 말은 아주 적절하고 귀한 말이다.”
“사람은 추위를 알게 되어 따뜻한 옷을 지어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되었고, 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을 구분하기 때문에 점점 부귀해지고, 또 아름답고 추함을 알기 때문에 보다 아름다워졌다고 생각됩니다.”
“열대지방에 거주하는 사람이 추운 곳을 모른다면 더위를 모르게 되고, 한대 사람이 찬바람에 그 몸을 드러내더라도 따뜻한 곳을 모른다면 춥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열대 사람은 북쪽에 가서야 비로소 추위를 알고, 한대 사람은 남쪽으로 가서야 따뜻함이 무엇인지를 안다. 열대사람이 마음으로 북쪽을 그리워하면 더위를 느끼게 되고, 한대 사람도 남쪽을 생각하면 그 몸이 추위 때문에 괴로워진다.
그 때문에 남쪽 사람에게 추위를 알게 하고, 북쪽 사람에게 더위를 알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물고기는 찬물 속에 들었어도 차갑다는 것을 모르는데, 가령 따뜻한 물속으로 옮겨 따뜻함을 알게 하는 것은 고기에게 무익하고, 유해할 일이다.
시골에 있는 사람은 거친 식사를 해도 그 음식에 맛없다는 것을 모르지만, 한 번 도시에 나가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면 비로소 그 음식이 맛없어진다. 음식물이 거칠더라도 생명을 유지하는데 충분하다면 억지로 맛있는 것을 알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맛을 알게 된 사람은 더욱더 맛있는 음식을 요구하게 된다. 달콤함을 추구하기 위해 사람들은 점점 괴로워지게 된다.
가난하더라도 이웃사람이 모두 가난하다면, 그것은 괴롭지 않다. 그러나 만약 이웃에서 웅장한 주택을 지어 올리면, 그 이후부터는 자신의 가난을 한탄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더욱 다투어 웅대한 저택을 짓기 시작하면 그 것은 더 이상 웅대한 저택이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다툼과 그에 따르는 괴로움만 있게 되는 것이다.
미추도 마찬가지이다. 누더기가 반드시 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아름다운 옷을 입으면 백 사람의 옷이 추해진다. 한 사람이 그 아름다움을 자랑할 때 백 사람이 추함을 한탄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추움과 더움, 아름다움과 더러움, 맛의 유무 등을 분별하여 아는 데에서 비롯된다. 갓난아기가 아직 맛의 유무를 모르고, 의복의 아름다움과 더러움, 추위와 더위도 모를 때 이것을 갓난아기는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성장하면서 이러한 것들에 관하여 식별하게 된다. 그래서 신체에는 언제나 따뜻한 옷, 아름다운 옷을 걸치려 하고, 맛있는 음식과 웅장한 저택을 원하며 얼굴에 치장 따위를 하려 든다. 이렇다고 해서 그들은 과연 어린아이에 비해 행복하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따뜻한 옷을 걸치게 되면서 시시각각의 문제에 긍긍하고, 맛있는 것을 알고부터는 부족해 보이는 음식에는 언제나 불만을 품는다. 웅장한 저택에 산다지만 결코 만족해 할 줄 모르고, 또 마음 한구석은 항상 불안하다. 그리하여 점점 초조하고 고뇌에 휩싸여 안색은 하루하루 생기를 잃어간다.
사람들은 이렇게 갖가지 분별로 인해 고민한다. 지혜로 인해 만드는 고민이다. 모르는 쪽이 좋은 것이다. 무지•불식보다 더 낳은 것이 없다. 보통 사람들은 현명하게 알면 명백해지고, 어리석고 모르면 미혹되어 불행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는 것이 미혹을 일으키며, 모르면 미혹도 없고 분명해진다. 미혹함이 없다면 행복할 테고, 그러므로 모르는 것이 약 그 자체이다.”
노인은 어디까지나 아는 것이 근심거리라고 말한다. …… 아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어디까지나 불행의 씨앗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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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은 무용하다.
노인은 인간의 앎을 부정한다. 지혜 또한 미워하고, 아는 것의 무용함을 부르짖는다.
“사람은 춥고 더움을 알고 나서 그것 때문에 괴로워한다. 맛을 알고 나면 맛없음을 한탄하게 되고, 부귀를 알고는 그것 때문에 괴로워한다. 또 미추를 알고는 아름다움이나 추함으로 괴로워한다. 아는 것은 근심의 시작이라는 말은 아주 적절하고 귀한 말이다.”
“사람은 추위를 알게 되어 따뜻한 옷을 지어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되었고, 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을 구분하기 때문에 점점 부귀해지고, 또 아름답고 추함을 알기 때문에 보다 아름다워졌다고 생각됩니다.”
“열대지방에 거주하는 사람이 추운 곳을 모른다면 더위를 모르게 되고, 한대 사람이 찬바람에 그 몸을 드러내더라도 따뜻한 곳을 모른다면 춥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열대 사람은 북쪽에 가서야 비로소 추위를 알고, 한대 사람은 남쪽으로 가서야 따뜻함이 무엇인지를 안다. 열대사람이 마음으로 북쪽을 그리워하면 더위를 느끼게 되고, 한대 사람도 남쪽을 생각하면 그 몸이 추위 때문에 괴로워진다.
그 때문에 남쪽 사람에게 추위를 알게 하고, 북쪽 사람에게 더위를 알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물고기는 찬물 속에 들었어도 차갑다는 것을 모르는데, 가령 따뜻한 물속으로 옮겨 따뜻함을 알게 하는 것은 고기에게 무익하고, 유해할 일이다.
시골에 있는 사람은 거친 식사를 해도 그 음식에 맛없다는 것을 모르지만, 한 번 도시에 나가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면 비로소 그 음식이 맛없어진다. 음식물이 거칠더라도 생명을 유지하는데 충분하다면 억지로 맛있는 것을 알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맛을 알게 된 사람은 더욱더 맛있는 음식을 요구하게 된다. 달콤함을 추구하기 위해 사람들은 점점 괴로워지게 된다.
가난하더라도 이웃사람이 모두 가난하다면, 그것은 괴롭지 않다. 그러나 만약 이웃에서 웅장한 주택을 지어 올리면, 그 이후부터는 자신의 가난을 한탄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더욱 다투어 웅대한 저택을 짓기 시작하면 그 것은 더 이상 웅대한 저택이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다툼과 그에 따르는 괴로움만 있게 되는 것이다.
미추도 마찬가지이다. 누더기가 반드시 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아름다운 옷을 입으면 백 사람의 옷이 추해진다. 한 사람이 그 아름다움을 자랑할 때 백 사람이 추함을 한탄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추움과 더움, 아름다움과 더러움, 맛의 유무 등을 분별하여 아는 데에서 비롯된다. 갓난아기가 아직 맛의 유무를 모르고, 의복의 아름다움과 더러움, 추위와 더위도 모를 때 이것을 갓난아기는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성장하면서 이러한 것들에 관하여 식별하게 된다. 그래서 신체에는 언제나 따뜻한 옷, 아름다운 옷을 걸치려 하고, 맛있는 음식과 웅장한 저택을 원하며 얼굴에 치장 따위를 하려 든다. 이렇다고 해서 그들은 과연 어린아이에 비해 행복하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따뜻한 옷을 걸치게 되면서 시시각각의 문제에 긍긍하고, 맛있는 것을 알고부터는 부족해 보이는 음식에는 언제나 불만을 품는다. 웅장한 저택에 산다지만 결코 만족해 할 줄 모르고, 또 마음 한구석은 항상 불안하다. 그리하여 점점 초조하고 고뇌에 휩싸여 안색은 하루하루 생기를 잃어간다.
사람들은 이렇게 갖가지 분별로 인해 고민한다. 지혜로 인해 만드는 고민이다. 모르는 쪽이 좋은 것이다. 무지•불식보다 더 낳은 것이 없다. 보통 사람들은 현명하게 알면 명백해지고, 어리석고 모르면 미혹되어 불행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는 것이 미혹을 일으키며, 모르면 미혹도 없고 분명해진다. 미혹함이 없다면 행복할 테고, 그러므로 모르는 것이 약 그 자체이다.”
노인은 어디까지나 아는 것이 근심거리라고 말한다. …… 아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어디까지나 불행의 씨앗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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