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집 '인연'에서 옮겨온 글이다.
세상살이를 되돌아보게 하는 글을 읽으면 반성도 하게되고, 닮고 싶은 욕심도 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읽을 때 느꼈던 절실한 감정은 슬그머니 마음속에서 떠나버린다.
선생님께서 50이 다 되셨을때 남기신 글이니 오늘의 나와 비슷한 상황에서 느낀 바를 그대로 표현하셨을 것이다. 누구나 50대에 이르면 한 두번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가 하는 공감이 간다. 제대로 들어선 길인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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陶淵明

지난 정월 나는 이런 말을 썼다. 사람을 대할 때면 언제나 웃는 낯을 하겠다고. 그러나 지난일 년 동안 웃는 낯을 갖지 못한 때가 많았다.
나의 미소는 교만한 얼굴, 탐욕에 찬 얼굴, 무서운 얼굴에 부딪치면 그만 얼어버리고 말았다. 억지로 웃음을 유지하여 보려고도 하였으나 그 웃음은 허위의 웃음이 되고 말았다.
나는 무표정한 사람이 되어가고있다. 나는 사람을 대할 흥미조차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 때로는 남이 듣기 좋으라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는 수가 있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난다.
나는 도시가 줄 수 있는 향락을 싫어한다. 그 많은 요리집도, 당구장도, 댄스 홀도, 나에게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찬란하게 차린 여자들도 나에게는 아무 매력이 없다. 영화 구경도 싱거워졌다. 자동차가 연달아 달리는 길을 한번 걷는다는 것은 큰 고통이요, 버스를 탄다는 것도 여간 끔찍한 노릇이 아니다. 그리고 엄청나게 커다란 간판들이 눈에 거슬리고, 분에 넘치게 사는 꼴들도 보기가 싫다.

누구의 글귀던가.
이경무다반종화 (二頃無多半種花 이경 밭이 많지는 않으나, 반은 꽃을 심다)라 하였다. 나는 우리집 온 마당에 꽃을 심었다. 울타리 밑에 국화도 심었다. 그러나 유연히 남산을 보는 심경은 되어 있지 않다. 나는 그저 오늘도 도연명(陶淵明)을 생각한다.

少無適俗韻
性本愛丘山
誤落塵網中
一去三十年

젊어서부터 속세에 맞는 바 없고,
성품은 본래 산을 사랑하였다.
잘못 도시 속에 빠져
삼십 년이 가버리다.

이것은 귀향한 뒤에 쓴 시의 구절이다. 이보다 먼저 그가 쓴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 중에는 다음과 같은 시구가 있다.

世與我而相違
復駕言兮焉求

세상과 나와 서로 다르거늘,
다시 수레를 타고 내 무엇을 구할 것인고.

나도 이 진의(眞意)를 못 깨달은 바 아니지마는, 아직도 서울살이를 하고 있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나에게는 고향이라고 할 고향이 없다.
양자강 남안(揚子江 南岸)에 있는 노산(蘆山)이라는 곳, 그에게는 아름다운 고향이 있었다. 당시 동진(東晋)에는 끊임없는 정쟁(政爭)이 있었으나, 농촌은 평화로웠던 모양이다.
애애원인촌 의의허리연(曖曖遠人村 依依墟里煙 어스름 어슴프레 촌락이 멀고, 가물가물 올라오는 마을의 연기), 그리고 그에게는 다행히도 방택십여묘 (方宅十餘畝)와 초옥팔구간(草屋八九間)이 있었다.
아직 채 내 소유가 되지 못하였지만 지금 살고 있는 아홉 평 집을 팔면 충청도 어느 시골에다 초옥팔구간 (草屋八九間)을 마련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방태십여묘(方숨十餘畝)도 껴서 살수 있을는지
또 하나 도연명이 부러운 것은 언제나 술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一觴雖獨進
杯盡壺自傾

혼자서 술을 마시지마는
잔이 비어지면 병을 기울인다
나는 멋진 글을 못 써 볼 것이다. 그러나 시골로 가면

짐승들 잠들고
물소리 높아가오
인적 그친 다리 위에
달빛이 진해 가오
거리낌 하나도 없이
잠 안 오는밤이요.

예전에 내가 지은 이런 시조는 다시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도연명(陶淵明)은 41세에 귀거래 (歸去來) 하였다. 나는 내일 모레 50이 되는데 늙은 말 같은 이몸을 채찍질하며 잘못 들어선 길을 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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